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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기

20. 다시 또

오늘 테잎들을 정리하다가 2001년에 찍은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빠가 찍은 듯한 화면이다. 낚시를 하고, 김치를 담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결국 또 그 자리에 돌아왔구나 생각했다.
예전에 황보출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나서 할머니를 떠올리며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다. 사실은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내 자신에게 물으면서, 가까이 가기 힘들었지만 누구보다 연민을 느끼는 나의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나를 발견하면서 뭔가가 툭하고 터졌었다.
아까 할머니의 영상을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영영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을 것 같다. 엄마없는 새끼들, 마누라 없는 자식놈 먹인다고 꼬부라진 허리를 잔뜩 숙여 김치를 만드는 그녀의 모습과 독한 저주의 말들을 퍼붓던 그녀의 모습과 나뭇껍질 같은 그녀의 손등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우습다.
나는 이 영화를 즐겁게 만들고 싶었다. 사랑하는 내 애인과 내가 얼마나 재미있게 잘 살아내는지 보라고, 우리는 가부장가족에서 벗어나 아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구성안을 쓸 때마다, 영화의 틀을 생각할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고, 할머니를 떠올린다. 이 영화에 대한 기획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면서, 니 과거의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것 같다는 충고도 들은척 않고, 결혼에 대한 부당함을 그런 특수한 케이스로 만들고 싶지 않다며 꽁알거려놓고는, 나는 자꾸만 내 얘기를 하고 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결혼식 장면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는지,
그 공간에 없을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며 울었었는지,
그런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싫다.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는 결국 그 상처들 때문에 이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게 드러나는 게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