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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목이의 하루/아빠의 기록

6.26

사람의 습관을 교정하는 데 요구되는 시간은 보통 3개월이다. '100일의 마법' 또한 그것과 관련이 있을 거다. 물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자라던 아기가 이곳, 건조한 세상에 나와 자신의 몸을 적응 시키려면 그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그나마 숨쉬기라도 익숙해질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양수가 완충해 주던 모든 물리적 자극들을 이곳에선 온전히 겪어내야 하니까. 중력과 관성, 온도변화, 빛과 어둠 모두.

100일이다. 예전에는 아기에게 100일상을 차려준 이유가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치하였다는데, 우린 그걸 한참 앞서서 치렀기 때문인지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던 듯싶다. 하지만 지민은 100일을 기념하는 떡 케잌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며칠 전부터 정보 수집과 예행연습까지 한 걸보면 나와는 다른 태도를 가지고 이날을 맞이한 듯도 싶다.

동목이 태어난 후 겪은 큰 변화 중 하나는, 가족이라는 형식의 관계가 삶 속에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나와 지민은 그것을 멀리하려 했고 가능하다면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명확히 하며 둘의 관계를 설계해 나가려고 했었다. 헌데 생각해보면 살림을 차리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우린 가족이라는 형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우리만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차린 살림을 결혼을 통해 만든 살림과 구별하질 못했으니까.

동목의 100일을 기념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 하나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잔치와 손님은 뗄 수 없는 관계라 '생각해낼' 정도의 것은 아니지만 우린 '누굴' 초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고민은 이날의 의미를 어떤 관계 속에서 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고민할 정도의 것인지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실제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고민한다는 사실 때문에 한 가지 울적한 사실을 알게 됐다. 지민과의 관계를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려 했던 생각과 그것과 관련된 태도들이 매우 수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고민하던 때에 내 외사촌 누님에게 전화가 왔다. 외숙모께서 아기를 보고 싶다해 이왕이면 100일날 오시라 했다. 예정보다 일찍 오신 외숙모와 사촌형님, 사촌누님을 뵌 순간 예상치 못했던 감정이 날 휘감았다. 어린 시절 날 키워준 고마운 손들과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로부터 온 감정들. 기억으론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건 오늘 온 외사촌 형님 덕이었다. 외사촌 형님이 날 도와준 이유는 내 어머니 때문일 거다. 외사촌 형님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한테는 외삼촌이신 분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의 유일한 형제인 어머니는 외숙모와 그의 자식들을 키우는 데에 여러 역할을 했을 테니까. 내 어머닌 서른이 넘어 결혼을 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었다.

어머닌 외숙모를 무척 좋아했다. 외숙모는 사촌형님과 함께 포천 쪽에서 사신다. 그곳은 어머니의 가족이 이북에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이다. 어머닌 할머니의 뱃속에서 피난을 내려왔다고 했다. 10여년 전 외숙모의 권사 임직식 덕에 오랜만에 그곳을 가게 된 어머니의 표정은 너무나 맑았다. 어머니에게 그곳은 고향일 테니. 그렇게 순수하게 맑은 표정을 짓던 내 엄마에 대한 기억은 그날이 유일하다.

'은혜'의 되물림과 부모에 대한 맑은 기억은 가족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내 이상과 바람은 이 앞에서 항상 힘을 잃는다. 


그리고...
혜진누나, 1년간 거둬 줬지. 피붙이도 아닌 사람을 같이 살게 해준 윤택이형, 채헌이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지.

100일간, 지민이 참 고생 많았지. 그렇게 큰 변화를 몸으로 온전히 겪어냈으니.

집안 잔치처럼 작은 것까지 신경써준 어머님, 아버님, 지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