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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기

24. 테잎 보기

작업실에 앉아 있는데 땀이 주르륵 흐른다. 밤이라 바깥은 시원하던데. 창문이 한쪽 뿐이라 바람이 잘 통하지 않나보다. 더운날. 이런 날 애 낳으면 더 힘들겠지? 어떤 일을 경험치로 환산할 때, 그 기준이 자꾸 출산이나 임신, 육아가 돼버린다. 그 전의 기억들은 잊혀지는 것인가.. 더우니 별 생각이 다 드네.
작업은 잠시 소강상태.
라고 하기엔 너무 쉬고 있다.
오늘은 촬영할 리스트라도 만들어보고자 피곤함을 무릅쓰고 작업실에 왔다. 넋놓고 있으면 시간은 금세 가버린다. 27분짜리 단편을 완성하는데 2년이 걸렸던 게 나다. 그 땐 테잎도 고작 19개. 그걸 못해서 미디액트로, 대방동 작업실로, 집으로, 애인 집으로 도망에 도망을 다녔었지. 이번엔 그럴 여유도 없다. 단디 맘먹고 해야 함. 그렇지만 자꾸 머릿속이 백지가 돼버리는 느낌.
출산할 때 테잎을 보고 있다. 아직까지 보지 못하고 놔두고 있었다. 사실 무서웠다. 그 때 힘들었던 것들을 몸이 기억해 낼까봐. 경화가 피칭에 쓰라고 2분 정도 편집해준 영상을 보고도 몸이 저릿해졌었다. 계속 미루기만하다가 용기를 내어 플레이.
36주. 이른 분만인데다가 바로 전전날 산부인과에서 내진을 했었기에, 설마 분만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주가 들어서야 일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3-4주, 출산과 그 이후를 준비하려 했었는데, 결국 나는 분만법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았다.
화면을 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황한 룸메의 얼굴. 태연한척 나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도 패닉상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카메라에 영상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그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울먹이는 그를 보다 나도 잠깐 울컥.
이 영화는 우리 연애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를 잘 할 자신이 없다. 내가 아주 만족하고 있는 이 관계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없을테고, 그래서 그 관계를 결혼 안으로 '굳이' 가져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허세처럼 보이지 않을까하는 마음 때문에 자꾸만 오그라들어서이다.
그렇지만 잘 하고 싶기에, 굳이굳이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