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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목이의 하루/엄마의 기록

편지

그제 까페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노트 한 권을 샀다. 보건소에 들러서 기형아 검사를 마치고 철분제를 받아 오는 길이었고, 걸어오는 그 길에 보건소가 믿을만 하겠냐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터였고, 안 그래도 약간 불친절(이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를 주눅들게 했던)한 의사의 태도에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 때였다. 노트를 산 건 2500원으로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무엇을 쓸까 싶었다. 쓰다만 일기장도, 단상들을 적어놓는 작은 수첩도, 일정 수첩도 있다. 일단 봉투를 뜯어 들여다보다가, 몹시 쑥쓰럽게도 뱃속의 아이에게 편지를 써 보았다.
'엄마'라는 단어도 '아이'라는 단어도 없이, 그냥 '너'와 '나'만으로 몇 줄을 끄적였다. 정말 쑥쓰러웠다. 마침 그날 오전에는 같이 회의를 하던 두 명의 쌤으로부터 동화책과 비타민을 선물로 받기도 해서 뭔가 엄마 포스가 막 생기는 것 같았는데, 막상 아기에게 편지를 쓰려니 자연스럽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는 김에 해 보자 싶어, 집에 돌아와 룸메에게 '다음 차례는 너이니, 써와라!'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뭐야~ 라며 불평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다음날, 다음 장을 채워가지고 왔다. 게다가 '아빠'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ㅎ 그가 쓴 편지를 보는데 살짝 눈물이 났다. 우리가 함께 지내온 지난 몇 년 간의 시간들이 떠올랐고, 이제 그 시간에 이 아이가 함께 할 거라는 실감이 아주 조금 들었던 것 같다. 우리가 지내온 시간을 떠올리듯, 쉽지만은 않을 것이고, 많이 투닥거리고 부딪치겠거니 생각하니 또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편지를 써 온 룸메가 기특해서 뽀뽀를 날려주었다.

이제 다시 내 차례인데. 너무 미루지 말고 무엇이든 꼭 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