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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기

40. 고마운 마음

무엇에 대해서든, 고마워하고 감사해하며 산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까칠한 탓도 있고,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것이 먼저인 세상에 너무 길들여진 탓도 있을 터.

얼마 전부터 108배를 시작했다.
그래봐야 후덜후덜, 108배를 채우는 날은 많지 않고 어떤 날은 60배, 어떤 날은 30배만 하기도 한다. 첫날부터 의욕적으로 덤볐다가 토할뻔했으므로,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종교적인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작업에 관한 생각들이 뇌를 뒤덮어 오히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머릿속을 비우고자 시작한 일이다. 가끔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부처삼아 절을 하기도 하는데, 그 기분도 참...
여하튼,
며칠 하지도 않아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정말 '몸'으로 하는 기도이다보니 머리로만 굴리던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되는 듯하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도 생겼고.
지금까지 <두 개의 선> 작업을 하면서 나는 늘 불만이 많았다.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여건을 탓하며 괜히 제작지원을 받았나 후회도 하고,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계속 옆에 있어줘야 하는 아이를 탓했다. 집이 서울에서 멀어서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환경을 탓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술담배도 편히 할 수 없는 모유수유모의 신세를 푸념하고. 제작비가 없는 것도, 편집컴이 오래된 것도 불평거리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더란 말씀.
<두 개의 선>이 여성영화제 제작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작업을 금세 포기했을 것이고, 나 스스로를 어쩔 수 없이 객관화해야 했던 사적다큐가 아니었다면 산후우울증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영원히 일자리가 없을 것처럼 우울해있었을 수도 있다. 아이는 아팠던 것을 잊을 수 있을만큼 건강하게 잘 크고 있고, 아이가 잠들면 난 작업실에서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다. 서울에서 멀긴 하지만 부모님이 대여해준 집 덕분에 월세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고, 게다가 내 평생 가장 넓은 집이라 아이도 신나게 기어다닐 수 있다. 도시가 아니라 공기도 좋고 조용하다. 술담배를 안 했더니 피부가 좋아지고 살도 빠졌다. 제작비는 부족했지만 우리 동네에 작업실을 얻은 친구 덕분에 큰 돈 들이지 않고 편집 공간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 되긴 했어도 편집컴은 컷편집에는 무리가 없다.

갑자기 너무 착한 아이 모드로 변신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고마운 것 투성이다.
작업도 잘 하고 싶다. 그 전까지는 영화제에 와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잠재적 비난자들로 상상이 돼 두려웠다면, 지금은 설령 그렇더라도 당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을 쓰니 조금 자신이 없어지긴 한다만...)
나처럼 왕소심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인간에게는 중요한 변화, 고마운 변화인듯.


뭐 그래서 이 밤에도 즐겁게 작업중이란 말씀?
렌더링 건 파일이 17분 남았기에 굳이굳이 고마운 마음들을 기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