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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일기

35. 변명

아이를 키우는 건 자신의 어린시절을 맞닥뜨리는 일이라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던 한 감독님은 말했다.
나의 트라우마는 책임, 이다.
기억이라는 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책임, 이라는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있다. 집에 없던 부모를 대신해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을 돌보던 기억이, 그 두려움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나는 그 비슷한 몇몇의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간은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이 너무나 무겁고 두려워서 많이 울었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는 그 책임이라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반대하는 결혼이, 나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때문만으로 비춰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결혼은, 근대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과 경제력의 사적 소유에 기인한다. 낭만적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 재산을 누구와 함께 소유할 것인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사랑은 '재산과 노동력의 사적 소유'에 기반한 각종 폭력적인 결혼의 문제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족 단위로 확장시켜 그 안의 개인을 희생시키는 관습에 반대하고, 그 '가족 단위'를 제도로 통제하려는 국가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얼마나 그 얘기를 해낼 수 있을까.
화면 속 나는 나약하고 비겁하다.
또 다른 감독님은 영화 속에서 너에게 도망갈 자리를 주면 안 된다고 했다. 너에게만 변명할 자리를 허용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여기서라도 변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