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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목이의 하루/엄마의 기록

소박한 데이트

아침부터 눈이 많이 많이 내렸다.
손님들 때문에 불안했는지 새벽부터 앙앙 울어대는 고양이들 때문에 룸메와 나는 잠을 조금 설쳤다. 그는 멍한 상태로 8시가 조금 안 되어 집을 나갔고, 잠시후 걸려온 전화. '눈이 엄청 와!'
나도 수영을 가겠답시고 셔틀버스 시간에 맞춰 9시즈음 헐레벌떡 집을 나섰는데, 그야말로 온 세상이 하앴다. 발목까지 푹푹 패이는 눈을 밟아가며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20분쯤 늦게 도착한 버스를 타고 체육관으로 가는 길은 더 하앴다. 운전을 안 해서 그런지, 길에 서 있는 차들이 걱정되기 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각도가 채 20도도 안 될 것 같은 언덕을 넘지 못하는 차들 때문에 도로는 꽉꽉 막혀있고, 차도는 이미 인도가 돼 있다. 아침 7시 반에 공항에서 출발했다는 아부지는 2시가 넘어서야 대학로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라디오에서는 회사로도 집으로도 못 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그득했다. 어머 어떡해, 하면서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하얀 눈을 폭폭 밟으며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좋고 사람들이 불평불만 섞인 전화통화 내용을 엿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집에 돌아온 룸메와 뜨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하루에 있던 일을 재잘거리며 이야기했다. 계절학기 수업을 듣는다며 엄마랑 같이 셔틀버스에 탔던 건장한 남자애 얘기랑 바퀴를 반쯤 꺾은채 달리고 있던 제네시스 얘기 같은 거. 그러다 그가 그런다. 그래도 난 눈오니까 괜히 웃음나고 좋아,
응, 나도.
둘이 괜히 실실거리며 웃다가 눈길 산책을 나섰다. 동네 친구를 불러다가 짜장면을 같이 먹고, 눈으로 뒤덮인 동네를 산책했다. 우와, 저기 쌓인 눈 좀 봐, 우와 이 차 다 얼겠다, 우와, 저기 눈사람봐, 우와 여긴 아무도 안 밟은 곳이야!
뒤뚱거리는 나를 붙들고 헤헤거리며 웃는 그가 좋다. 같이 이렇게 눈길을 걸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열심히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다가 손이 시렵다며 발을 동동구르는 그와 함께 웃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올해는 종종 이런 소박한 데이트를 즐겨야겠다. 잇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