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작일기

12. 반성, 이라기보다는 넋두리

어제 할머니댁에 갔다. 아기 낳기 전에 친척들에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전날 프리뷰 작업하면서 느낀바(;;)가 있어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들고 갔다. 하지만 촬영을 못했다. 촬영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조금 더 용기를 내면, 혹은 조금더 부지런하면 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결국 못했다. 촬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인데, 그 문제를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촬영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  카메라를 들지못했다. 몸이 자유롭지 않은 지금이 싫다. 재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다. 이런저런 짜증들이 쌓여서 저녁때는 얼굴이 울긋불긋, 같이 간 룸메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힘든 하루였는데 미안하다 싶으면서도 이렇게 계속 놓치기만 하는 게 싫다. 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 오만했던 거였을까.

아침에도 몸이 너무 힘들어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광화문에 다녀오고 나니 몸은 곤죽이 됐다. 퍼져서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마음이 불안해서 작업실에 나왔다. 다음주가 공모마감인 곳에 기획서를 내 보려고 한다. 한 줄이라도 더 써보려고 붙잡고 있는데 잘 안 됐다. 그러다 예전에 어떤 장면을 찍었던 게 생각나서 화면을 보려고 찾아보니 파일이 없다. 지난 번에 여기저기 외장하드에 흩어지게 옮겨놓은 촬영소스들을 모으면서 날짜별로 정리를 했는데 그 과정에 겹친 파일들이 있었나보다. 대단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쉽고 속상하다. 괜히 테잎리스 카메라를 썼다고 후회도 하다가 몇 번 컴퓨터를 뒤적뒤적거리느라 결국 한 시간 가량이 지나버렸다. 포기할 건 포기하기. 앞으로 잘하면 되지, 라고 세뇌시키는 중이다.

그냥 추억꺼리로 촬영하지 뭐,
마음을 편히 갖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생각이라기보다 도피였는데, 그게 자꾸 발목을 잡는가보다. 기획서를 쓰려고 해도, 계획들을 적어보려고 해도 막상 계획된 게 없다. 촬영도 그냥저냥 생각나면 하는 거고, 책도 그냥저냥 생각나면 본다. 촬영을 부탁했어야 하는데도, 에이 까짓꺼 힘들게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내가 하지 뭐, 아니면 촬영 안 하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기도 했다. 잘 할 자신이 없다는 생각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기획서를 쓰다보니 그런 빈틈들이 자꾸 보이고, 내가 지금 연출자로서 무엇을 잡고 가고 있나 싶기도 하다.

기획서를 더 쓰러 왔다가 한줄도 더 못 쓰고 고민만 잔뜩 안고 집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