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이 아득하다.
3월 18일 목
아르코 소극장에서의 첫공연. 지민은 힘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우린 진통과 가진통에 관해 검색했다. 현재의 진통이 ‘신호’인지 우려하며. 우린 끝내지 못한 중요한 일들이 남아 있었고 출산 예정일은 3~4주 후였기 때문이다.
귀가 후 병원에 문의. 우린 약간 긴장된 상태로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분만을 예상치는 않았고 병원을 향해 가는 길은 여행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우린 어색하게 셀프 카메라를 찍었다.
“병원 가기로 결정하길 잘 한 거 같애”
“기분이 어때?” / “오늘 안 낳았으면 좋겠어”
밤 12시 무렵 병원에 도착했다. 지민은 먼저 내려 병원으로 들어갔고 나는 주차를 했다. 지민은 벌써 분만실로 들어가 검사를 받기 위해 준비 중이었고, 나는 입원 수속을 밟았다.
3월 19일 금
분만 준비를 끝낸 지민은 분만실에 누웠다. 진통 주기가 점점 잦아졌다. 새벽 3시 쯤으로 기억한다. 진통 중 내 손을 쥐는 지민의 힘에 놀란 때가.
4시경 본격적으로 분만 준비에 돌입. 전날 식사를 제대로 못한 탓에 지민은 곧 지쳤다. 난 분만실 밖으로 쫓겼고 의료진은 지민의 배를 압박해 분만을 돕기 시작했다. 분만실 안에서 침대가 삐그덕 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나는 그러한 처치에 몹시 흥분했고 또 두려워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고, 지민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컸다.
지민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6시 7분. 아이가 태어났다. 탯줄로 엄마와 연결돼 있는 아이는 지민의 품에 안겼다. 잠시 후 난 탯줄을 잘랐다. 그건 일종의 의식 같았다. 아이는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로 옮겨졌고 난 아이를 받쳐 숨을 쉬게 도왔다. 한참을 잡고 있었다. 의사가 지민의 열상을 치료하는 시간 만큼이었다. 아이가 내 손가락을 잡았다. 내 검지 손가락 두마디 정도가 아이의 손에 잡혔다. 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간호사가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잠시 지민과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헌데 기억나질 않는다. 그저 지민의 편안한 얼굴이 좋았다. 모자를 씌운 아기가 들어왔고 지민은 젖을 물렸다. 아이를 안은 채 나를 향해 엷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지민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3월 20일 토
9시 모의피칭, 11시 30분 인터뷰, 4시 태능동물병원. 병원에 오기 전부터 야옹이가 한 쪽 뒷다리를 디디질 못했는데 부러진 거였다. 수술하는 동안 노원에 있는 백화점에 들러 지민의 수유 브라를 구입하고 AS를 맡긴 내 신발을 찾았다.
3월 21일 일
아버지가 왔다 가셨다.
이날 밤 지민이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같이 누웠다. 지민은 내게 안겨 아이가 낯설다며 울었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3월 22일 월
아이가 황달에 걸렸다. 황달 치료를 위해 아이의 눈을 가렸는데 우린 그 모습을 놓고 힙파퍼 같다며 즐거워했다. 황달은 흔히들 겪는 증세라 여겼다.
3월 23일 화
아이가 잘 먹지 못한다는 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3월 24일 수
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여 하루 간 금식을 시킨다고 했다.
3월 25일 목
추계 예술대학교로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지민은 울었고 아이가 큰 병원으로 이송된다고 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목이라 학교에 들러 사정을 말한 뒤 병원으로 출발했다. 지민의 어머닌 입원 수속을 밟으러 나가셨고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공갈 젖꼭지를 열심히 빨아댔다. 그러다 젖꼭지를 놓치면 울어댔다.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수련의 한 명이 와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단순 소화 불량은 아닌 거 같고, 장염 아니면 장 협착 정도를 의심한다고 했다. 유착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피검사를 시작으로 초음파 검사, 조영제 투여 후 관찰(CT일 거라 생각했다)의 순서로 진행할 거라 했다. 검사 결과는 다음날 정도 나올 거라 했다.
설명을 들은 후 병원을 나왔고 지민이 있는 조리원에 들러 잠시 앉아 있다가 집으로 향했다. 몇 가지 물품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원인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중장 이상 회전’. 장이 자리를 잡을 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서로 꼬여 생기는 증상. 꼬인 부위에 혈액이 잘 돌지 않아 괴사가 오게 됨. 개복 후 자리를 잡아 주는 것이 치료법. 수술을 진행할 거라 했고 수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 테니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라고 했다. 급하게 집에 들러 옷가지 몇 벌을 대충 챙기고 나왔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예상보다 수술 준비가 빨리 끝났다며 바로 올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다. 그 와중에 지민의 아버지와 지민과 통화를 했다. 개복 수술이니 더 크고 좋은 병원으로 전원해야 할 거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내 어머니 때의 경험도 있어 고민이 많았다. 병원에 도착할 즈음, 전원을 신속히 할 수 있으면 전원을, 그렇지 않으면 수술 진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게 됐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수련의에게 그러한 뜻을 전했고 그녀는 서울대병원에 전원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외과 소속의 수련의가 들어와 수술 진행에 대한 설명과 수술 중 부작용 등에 대해 설명했다. 아이의 장이 꼬여있던 시간이 길었으면 괴사가 진행됐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괴사된 장을 절개한 후 장끼리 문합하는 수술을 하게 된다는 것, 마취 시 인공호흡기를 설치하게 되는데 부작용으로 기흉 등 폐에 문제가 올 수 있음, 감염의 우려 등등. 결국 사망의 가능성까지 언급. 옛 생각이 떠올랐고 그때처럼 순진하게 응하진 않으리라 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서명.
서명 후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담겨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5층의 신생아 중환자부터 지하1층의 중앙 수술실까지 따라갔다. 아이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갔고, 마취과의 수련의가 와 다시 동의서를 받아갔다. 혀 짧은 소리로 여러 부작용에 대해 얘기했고 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끄덕끄덕. 서명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지민의 아버지가 오셨고 지민이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왔다. 전체적으로 묵묵했고 간혹 실없는 소리들을 했다. 잠시 후 지민을 다시 보냈고 아이는 수술실에 들어간 지 3시간만에 다시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술이 잘 됐다는 한 마디의 말이 전부였다. 지금 와 생각하지만, 그 말 외에 더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3월 26일 금
아이를 보러 갔다. 입으로 두 개의 관이 들어가고 있었다. 뱃속의 배액을 배출시키는 관과 폐로 연결된 인공 호흡기. 한 쪽 손에 수액이 들어가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나머지 손과 두 다리에는 대사 기능을 체크하는 각종 센서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배 전체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3월 27일 토
자가 호흡을 조금씩 하고 있어 인공호흡기는 제거.
기다린다는 것.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건데도 참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린 몹시 힘들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리고 나와 지민은 한 순간에 ‘부모’가 돼 버렸다. 깊이.